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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민] 우리 아버지들처럼, 하루하루 배우의 역사를 쌓다

누군가의꿈이될 | 2014.12.30 15:56 | 조회 71

 


- <국제시장> 황정민 -



“아부지… 내, 약속 잘 지켰지요?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요?” 암, 잘 살았지. 잘 살았다마다. 아버지만 살아 계셨어도 우리 장남 장하다며 어깨 툭툭 두드려주셨을 거다. 열두살엔 한국전쟁으로 피난길에 오르고, 스물여섯엔 서독에 가 광부로 일하며 외화를 벌었다. 갱도에 갇혀 죽다 살아났고, 고국으로 돌아와 처자식 데리고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었는데 이번엔 베트남에 파견 가란다. 어쩌랴. 고모가 눈물로 지켜낸 가게를 내놓기 싫은 마음에, 철없는 막내동생 시집가겠다는 성화에 서른 넘어 어렵사리 붙은 대학 합격증도 치워버리고 목숨 걸고 베트남 정글로 날아갔다. 목숨줄 대신 다리 한짝 잃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면 다행. 젊어서 한 고생이 슬슬 복으로 돌아오는지 마흔 고개를 넘겨서는 피난길에 잃어버린 여동생도 찾고, 자식들 모두 시집, 장가보내 토끼 같은 손자, 손녀까지 얻었다. 대체 누구의 삶이기에 이토록 파란만장하냐고? ‘그때 그 시절’은 다 그랬다. 특별할 것 없는 그냥 ‘아부지’들의 이야기다. <국제시장> 꽃분이네 윤덕수, 아니 경상도 사나이 황정민 이야기.


“이건… 공포영화인가?” 황정민은 “새로운 구성이 낯설었다”고 했다. “한 남자의 인생에서 임팩트 있는 부분만 발췌한 것이지 않나. 인물의 정서를 천천히 따라가야 하는데 훅훅 먹는 나이만큼이나 상황마다 한꺼번에 발산하는 연기가 쉽지 않았다. 완급 조절 없이 관객을 몰아가게 돼 부담을 주지 않을까 우려했던 기억이 난다.”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국제시장>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윤덕수의 삶 자체가 우리 현대사의 굴곡과 그대로 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6/25전쟁과 피난, 파독 광부들, 베트남전쟁의 굵직한 역사적 키워드들은 한 남자의 생의 어떤 순간이기도 했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빈틈은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 가수 남진, 씨름선수 이만기, 수입상점 ‘꽃분이네’의 변해가는 간판들, 제임스 딘과 앙드레 김 등 과거의 문화적 코드들이 빼곡하게 채웠다. 생활사적 디테일들은 황정민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개인의 시간으로 옮기는 데에도 크게 도움을 줬다. 소품과 세트로 만들어진 환경이 그때로의 몰입을 가능하게 해줬다. “1983년의 이산가족찾기 방송은 나도 울고 웃으며 봤던 기억이 난다. 동네엔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한손을 잃고 의수 끼고 다니는 용사 아저씨들이 무척 많았다. 또 그 시대를 살지 않았어도 우린 우리의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많은 얘기를 듣고 자라지 않았나. 자연스럽게 몸에 익은, 나에게 묻어나 있는 것들이 이미 충분히 있었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황정민이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국제시장>을 선택한 단 한 가지 이유다. “엄마에 대한 얘기는 참 많은데 아버지 얘기는 오히려 없다고 느꼈다. 윤제균 감독님이 전화하셔서 시나리오 보내신다기에 하나만 물었다. ‘무슨 얘기예요?’ ‘아버지 얘기요.’ ‘할게요, 그럼.’” 황정민은 대본을 보고서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아버지 연기가 그에게 처음인 건 아니다. <전설의 주먹>에서 그는 한때 복싱 유망주였던 국숫집 사장 덕규를 연기했다.

덕규는 자식 때문에 다시 가드를 올리게 된 아버지다. 덕규가 자기 자식만의 아버지였다면, <국제시장>의 덕수는 무수한 아버지들의 보편적인 상이다. “실제로 나도 아이들을 둔 아버지이지만 배우기도 하다. 이미 평범하지 않은 삶인데 아주 평범해야 하는 덕수라는 사람을 어떻게 보여주면 좋을까 생각했다.” 해답은 오로지 대본에 있었다. “대본만 주야장천” 봤고 촬영 중에 윤제균 감독뿐 아니라 스탭들에게도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덕수가 내가 맞냐고” 항상 물어봤다. 지극히 평범해야 하는 사람이기에 “제3자의 눈으로 보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덕수의 대학 합격증이 날아가는 장면이 있지 않나. 고모부(홍석연)랑 싸우고 나서 그 신을 찍고 들어오는데 갑자기 화가 막 나더라. 내가 지금 내 삶을 안 살고 뭐하고 있나 싶어 진짜로 짜증이 너무 나는 거야. 그 정도로 감정이 올라올 줄은 나도 몰랐다.” 그 “짜증”은 뒤이은 덕수와 영자의 대화에서 고스란히 폭발했다. 대학 합격증을 날려보낸 덕수가 베트남에 파견 근로자로 가겠다고 하자 부인 영자(김윤진)는 화를 낸다. 영자의 화를 묵묵히 들어주던 덕수도 참지 못하고 고함으로 받아쳐버린다. “이런 기 내 팔자라고! 내 팔자가 그런데 우짜란 말이고!” 아버지의 팔자란 그런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역사의 숱한 순간에 새겨진 평범한 남자의 아이러니는 황정민에게도 여러 생각을 안겼다. “일상적으로 스치는 모든 순간이 나도 모르는 새 역사의 한쪽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쳤다. 영화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새삼 되새겼다. 어쩌다 하필 이 시기에,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사람들과 만나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일까. 얼마나 신기하고 커다란 인연인가. 동시대를 산다는 감동을 50년 뒤의 관객은 나만큼 모르지 않겠나. 다작배우네, 소처럼 일하네, 라고들 하는데 별 이유 없다. 그 감동, 인연. 그래서 미친 듯이 작품을 하는 거다. (웃음)”


황정민에게 <국제시장>은 분장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노인 분장에만 기본 네 시간이 걸렸다. “최적의 컨디션일 때 촬영에 집중하고 싶은데 7∼8시간씩 분장하다보면 너무 지쳐버리는 거야. 그걸로 진빼기 싫다면서 무조건 빨리 하는 사람으로 구해달라고 했다. (웃음) 나중엔 익숙해지니까 세 시간 만에도 하더라. 자연스럽게 주름도 잡을 겸 얼굴에 피부 붙인 채로 일부러 밥도 먹고, 찡그리고 그랬다.” 분장이 아깝지 않을 완벽한 노인 연기를 위해 섬세한 표현도 연습했다. 힘없이 흔들리다 떨어지는 손, 굽은 어깨와 등, 꼬장꼬장한 성격을 감당하기엔 기운이 달리는 목소리의 디테일은 황정민을 온전히 70대 노인으로 보이게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다. “‘황정민이 늙으면 저렇게 되겠는데?’로 비치고 싶었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산 적도 있고, 병수발 들며 직접 똥오줌 받아드린 경험도 있어 그때 기억을 떠올려 연구 많이 했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 70대의 돈키호테를 연기했던 것도 무척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노인의 성격이었다. 국제시장에 알박기로 수십년을 버틴 성격이 보통 성격이겠냐고.” 베트남 파견 중 한쪽 다리를 잃어 의족을 찬 덕수의 걸음걸이를 연기하는 것도 보통이 아니었다. “처음엔 굽높이에 차이를 둔 신발을 특수제작해서 신었는데 영 불편하더라. 불구의 몸으로 걷는 게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신발이 익지 않아서 어려웠다. 비디오를 찍어 내 걸음을 관찰하면서 불구이지만 어색하진 않게 걸으려 했다.” 반면, 뽀얗고 건강한 20대 덕수의 복근은 붐 오퍼레이터에게서 빌려왔다. “당연히 대역이다. 내가 그 몸을 어떻게 만들어. (웃음) 사실 내가 젊을 때 그렇게 ‘뽀샤시’하지도 않았거든. 지금이랑 똑같다. 붐맨하는 친구 몸을 합성한 건데 해놓으니 좋더만. ‘동안CG’ 자주 써달라 해야겠다. (웃음)”

새해엔 우리나라에 배우가 황정민밖에 없던가 싶을 정도로 황정민을 더 자주 만나게 될 것 같다. 일찍이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 중인 <베테랑>, 박수무당으로 짧게 출연해 깊은 인상을 새길 <곡성>, 현재 바삐 촬영 중인 <히말라야>에 이어 <검사외전>까지 황정민은 이미 당분간의 라인업을 모두 점찍어뒀다. “류승완 감독님과 또 같이하고, 달수 형이랑도 또 같이 나오는 <베테랑>은 우당탕탕 하는 형사물이라 무척 재밌을 거다. <곡성>에선 곽도원이 주인공이고, 나는 박수무당으로 영화 중간에 잠깐, 끝에 잠깐 짧게 나온다.” <군도: 민란의 시대> 조감독이었던 이일형 감독의 데뷔작 <검사외전>은 일종의 버디무비다. 어떤 오해로 십년간 복역하게 된 검사가 손을 써 함께 갇힌 죄수 하나를 풀려나게 해준다. 사회로 나간 그 죄수는 검사의 수족이 되어 검사를 무죄방면토록 하는 데 힘쓴다. 황정민은 검사를 연기한다.

한창 촬영 중인 이석훈 감독의 <히말라야>는 박무택 대원의 시신 수습을 위해 히말라야 설산을 오르는 엄홍길 대장의 이야기다. 생존해 있는 인물의 실명을 그대로 쓰는 바이오그래피가 부담이 될 듯싶지만 “엄홍길 대장을 흉내내는 건 아니”라고 한다. “엄홍길이란 사람의 본질은 가지고 오되 모사여선 안 될 것 같다. 대장님에 관해 더 알고 싶어서 술도 함께 자주 마셨다. 처음엔 좋은 얘기만 하시더니 나중엔 우리는 모르는 캠프 안에서의 상황, 죽음이 왔다갔다하는 그 순간의 긴장에 대해서도 말해주셨다. 죽음을 무릅쓰고 올라가는 그 마음들은 대체 뭘까, 그게 제일 궁금했는데 차차 알게 됐다. 그건 업이다. 어쩔 수 없더라. 거기 올라가면 그냥 죽는 거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동료의 시신을 가지러 거길 가겠대. 그 마음이 이 영화의 핵심이었다.” 고산병 증세를 알기 위해 경희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원에 찾아가 고소적응체험도 해봤다. “4000m부터는 생수병이 막 쪼그라든다. 사람이 술먹은 것처럼 잠이 오고 몸이 퍼지더라고. 그 상황에선 동료고 뭐고 다 없어진다. 오로지 나만 있는 거다.” 산행에 대한 감각을 익히려고 박무택 대원을 연기하는 정우와 1박2일 산행도 갔다. “산악영화 찍는데 한번은 올라봐야 하지 않겠나. 선달산 25~26km 구간을 오르는데 와… 죽는 줄 알았다. 나중엔 기어다녔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할 <신세계> 프리퀄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말은 오가는데 잘 모르겠다. 프리퀄인데 우리 나이가 이미…! 영화 전체에 ‘동안CG’를 덧칠할 순 없잖나. (웃음) 쉽지 않을 프로젝트다.” 어느 작품이든 궁금하지 않은 것이 없다. 전성기나 슬럼프라는 말이 의미 없는 남자. 이만하면 잘 살았지? 황정민에게선 언제가 돼야 이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아마도 오래 기다려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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